[기고] 조용히 찬기가 스미는 가을비가 낙엽들을 적시던 토요일.
▲ 하연진 소통과연대 운영위원
오후가 되면 개일거라는 예보를 믿고 가방하나 달랑 메고 한경대 주차장으로 갔다. 하나 둘, 낯익은 얼굴들이 모이고 일곱이 되자 평택행 시내버스를 탔다. 도중에 몇 사람 더 합류해 평택역에선 일행이 10명으로 늘어 있었다. 서울역에 내리니 그친다던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역 앞에서는 전국 노점상연합회 회원들 수백 명이 집회를 마무리 하고 막 행진하고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얇은 비닐 우비를 몇 개 주워 나누어 입은 우리도 ‘안성사람들’이라 쓰인 깃발을 높이 들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평소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점유했을 넓은 서울시내 한 복판을 깃발을 앞세우고 걷는 그 기분은 해방감 그 자체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은 느낌. 너와 나를 가르지 않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씩씩하게 어울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당당히 외치며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해방감.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행진해 오는 농민단체 회원들을 만났다. “밥쌀수입 금지”, “못살겠다, 갈아엎자” "개사료 1kg 5,330원, 쌀 1kg 1,275" 농사로 다져진 늙수그레한 얼굴들에 결기가 비쳤다.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리는 우리 농민들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한 함성들에 가슴이 아팠다. 안성지역 농민회 회원들이 이미 그곳을 벗어나 광화문으로 갈 것 이라는 말에 우리도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걸었다.
조금 가니 거기에 또 한 무리의 시위대가 집회 중이었다. 노동조합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지만 우리가 만나고 싶었던 두원노조 깃발을 찾지 못했다. 시위대는 차벽으로 막혀 더 이상 행진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잠시 집회에 함께 하다가 농민들이 종각 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종각으로 갔다. 여기저기서 여러 시위대가 모이는 중이었다. 세월호 진상을 규명하라는 팻말을 든 사람들, 노동개악을 규탄하는 문구들, 농민들, 청년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어린 학생들.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빗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합리적 토론이 실종되고 자신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 배제하고 억누르는 오만한 권력에 이런 방식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이 속상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농민회를 찾아 깃발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우리는 이내 다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역시나 이곳도 차벽으로 시위대의 행진이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도로를 걸으면서 느꼈던 해방감은 이렇게 자꾸 철통같은 차벽에 막혀버리면서 답답함과 분노로 바뀐지 오래였다. 차벽은 마치 진실이 왜곡되고 소통이 거부되며 단절되는 현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상징처럼 여겨졌다. 사람들은 길을 열어 달라 항의하며 구호를 외쳤고, 경찰들은 우리에게 최루액을 분사했다. 뿌리고 또 뿌리고… 숨을 쉬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그때였다. 엠블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시위대를 뚫고 진입한 것은. 홍해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고 구급차는 앞쪽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일까, 누가 다쳤나 서로 걱정스런 눈빛들로 물었지만 알 수 없었다. 최루액은 계속 분사되는 중이었다. 한참 후 구급차가 다시 나갔고 좀처럼 열리지 않는 차벽에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었다. 두원노조와 연락이 닿은 우리는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민노총 집회장소로 돌아갔다. 그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행진은 답보상태였고 사람들은 지쳐보였다. 두원노조원들과 이산가족 상봉하듯 반가이 합류한 우리는 두원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그곳을 나와 을지로 3가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을지로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들었다. 농민 한분이 물대포를 맞고 위중하다는 급보였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이렇게 먼저 가도 되는 걸까,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미안함과 걱정을 안주삼아 소주도 한잔 마셨지만 결국 안성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11월 14일 민중총궐기의 하루가 끝나갔다. 아이들 키우며 먹고 사는 일에 마음 쓰기 바쁜 소시민인 내게 왜 그런 곳엘 가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 그래봤자 변하는 거 하나 없더라며 냉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으며(프란치스코교황),”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아인슈타인)” 이기 때문에 나는 참여한다. 그리고 여러분도 초대하고 싶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서 존중받으며 살아갈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가만히 견디며 사는 거 이제 그만하자고. 함께 작은 노력이나마 보태가자고. 하연진 소통과연대 운영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