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성시의 정책기조가 많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지역경제 활성화 도모와 교육복지 확대를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평가하긴 이르다 할지라도, 개인적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적 자원의 발굴 양성과 보편적 교육복지를 위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 운용하고자 하는 부분은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시정의 변화는 단체장의 의지와 마인드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라 할 때, 바우덕이에 목매단듯 소모적으로 집착했던 전임 단체장에 비해 진일보했다고 생각하며, 일정 부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부응하여 시의회 또한 과거 거수기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떼어내고 새롭고 의욕적인 모습으로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최근 유혜옥 의원이 발의하여 제정 공표한 <평생교육 조례>도 그 한 사례라 할 것입니다. 이 조례의 근간을 이루는 입법정신이나 내용에 대해 본인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례를 도입하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은 유혜옥 의원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음미하고 검토해야 할 문제들이 있기에 여기에 의견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1.
일단,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조례의 근간을 이루는 용어인 ‘평생교육’이라는 표현이 적실성과 보편타당성을 담지한 용어인가 하는 점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말이 뜻을 담는 그릇이라 할 때, 핵심개념을 표현한 용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의 함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다시피 이 개념은 1960년대 프랑스의 교육사상가 폴 렌그랑이 제창한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제도교육 또는 학교교육의 대응개념으로 광범위한 사회교육을 의미하는 대안적 평생학습의 신봉자로, ‘학습을 위한 월차휴가’라는, 당시 산업시대의 패러다임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급진적인 주장까지 내놓기도 했었지요.
우리 보다 먼저 이 제도를 도입한 이웃 일본의 경우, 1980년대부터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어 「생애학습 진흥을 위한 시책의 추진체제 등의 정비에 관한 법률」(약칭 생애학습진흥법/1990년)을 제정하고 각 지자체가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법률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의 경우는 학계, 중앙정부, 지자체 모두가 ‘각쇼우(학습)’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최근 우리나라도 수직적 타율적 강제성의 함축을 담고 있는 평생 ‘교육’보다도, 자율적 능동적 의미를 적극 반영하는 평생 ‘학습’이라는 용어로 개념이 재정립되는 추세로 알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 지자체의 조례는 ‘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위법인 <평생교육법>을 그대로 추수, 준용한 것이지요. 그러나 국가법률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평생교육법>은 평생학습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학교육과 연계한 학점은행제도, 독학사학위제 운영 등 기존의 제도교육, 학교교육의 틀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평생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지자체들에서 시행하는 이른바 평생교육은 학점은행제나 독학사제와 무관하게, 광범위한 대안적 사회교육적 성격으로 시행되는 제도라는 점에서 용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본은 애초 레그랑의 ‘에뒤카시옹 페르마낭트’(éducation permanente) 개념을 ‘생애교육’으로 새겼다가, 이즈음에는 ‘생애학습’으로 바꾸어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도 이를 ‘life-long learning’(educating이 아니라)으로 번역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평생학습 도시’ ‘평생학습 축제’ ‘평생교육원’ ‘평생교육법’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학습과 교육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배우고 익힘을 학교 중심에서 사회 중심으로, 특정 적령기에서 평생으로 전환하는 대안적 발상이 깔려 있음을 고려할 때 평생학습을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3.
‘학습’은 자율적으로 자기주도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활동인 반면, ‘교육’은 말 그대로 타율적으로 수동적으로 가르쳐서 길러내는 활동을 뜻합니다. 동양적 교육개념의 이상이 “시간과 여건이 허락할 때마다 배우고 익히는”(學而時習) 것이지,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평생학습이 바로 학이시습이요, 학이시습이 바로 평생학습입니다. 학이시습은 스스로 ‘배우고’(學)과 ‘익히는’(習) 것이지 ‘가르치는’(敎)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양 교육(Pedagogie)의 이상으로 여기는 “빌둥”(Bildung) 개념 또한 자기 문화, 자기 인격, 자기 능력을 스스로(즉 자기주도적으로) 갈고 닦는 것(cultivate)이지 누군가가 주입시키고 강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아실현을 위한 교학상장’(敎學相長, 배우고 가르치면서 서로 성장한다)이 근대 제도교육사상의 핵심개념으로 자리잡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도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을 본인은 인정합니다. 더구나 안성시의 조례가 ‘평생교육’이라는 용어를 고수한 것이 상위법인 「평생교육법」의 용어를 준용했고, 다른 지자체가 대부분 ‘평생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이 뜻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을 때, ‘평생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평생교육’이라는 용어 혹은 개념은 앞서 말한 학이시습의 정신에 배치된 기능주의적 교육관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학교교육의 프레임으로 접근한) 조례의 행간에서 ‘우리가 너희(시민)를 가르쳐 보겠다’는 수직적 관료적 의지가 읽히는 까닭입니다. 이 조례의 정신에는 “평생 함께 배우고 익히자” 하는 수평적이고 참여적인 겸허한 접근과 발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한때 ‘국민’을 계도와 훈육의 대상으로 여기던 때도 있었습니다. ‘국민’이 스스로 ‘시민’으로 계몽되지 못한 미숙함 때문에 자초한 일이었지요.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정신을 호흡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정신에 부합한 자세와 태도가 조례의 입법정신에 스며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논어>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배움’(學)과 ‘익힘’(習)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의 자기도야에 대한 가치의 척도를 제시하는 압축적인 표현인 바,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 시 관련 조례의 핵심개념이 평생‘교육’이어야 하는지 평생‘학습’이어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주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4.
잘 아시는 것처럼 근대국가가 확립된 이래 국가가 위임받은 교육은 그 근본이 복지, 그것도 시혜적 복지의 프레임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시혜는 필연적으로 주입과 피동의 악순환을 불러왔습니다. 자기계발을 위한 학이시습은 능동적 자발적 참여적일 때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주도적 “교육”이 아니라 자기주도적 “학습”이라 하는 거지요.
행정영역이 중심이 되어 평생학습 제도를 새롭게 시행하고자 하는 바, 기존의 제도교육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구태여 이런 조례를 제정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평생학습’은 기존의 제도교육이 제도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영역, 곧 넓은 의미의 사회교육, 나아가 대안교육적인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행정가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평생교육’은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로 적절치 않은 개념으로 재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5.
아울러 기존에 시행하고 있는 다문화프로그램을 강화 연계하는 내용을 조례에 보강해야 한다고 봅니다. 동 조례에는 문맹자에 대한 문자해독교육은 구체적으로 적시했지만 이즈음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다문화 구성원들에 대한 배려를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 시의 경우, 구체적인 통계치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문맹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문화가정의 경우 구성비가 이미 5%에 육박하고 있고 향후 증가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문뱅자의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감소할 게 분명합니다. 또한 다문화 문제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에 문맹자보다 다문화 구성원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
조례는 조례의 목적을 실현할 시설로 평생학습관을 설치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그 구체적인 업무와 운영방안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관의 고유목적을 구현해야 하는 측면에서 볼 때 학력신장 문제는 보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존의 청소년 시설이나 다양한 형태의 학원 또는 교습소가 담당할 일이지, 평생학습관의 고유취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차라리 학습관에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적극 반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지역은 도시화되고 외부 인구가 대폭 유입되면서 정체성과 소속감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런 위기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체험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7.
평가할 부분도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인문교양,” “문화예술,” “시민참여”라는 꼭지를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역을 더불어 나누고 누리는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할 평생학습관의 관장이나 실무자들의 자격요건을 “교육학 전공자 또는 관련경력자”로 한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교육행정가나 교원들이 평생학습관의 실무를 관장해야 한다는 당위를 염두에 둔 규정인 듯합니다.
그러나 교사나 교육학 전공자가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어 수학을 가르치는 활동에는 특화해 있을지 모르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은 물론 인문교양이나 시민참여 같은 주제를 과연 ‘가르칠’ 유일한 적임자들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임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다른 지자체 조례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규정일뿐더러, 교육행정가적인 발상과 기능주의적 교육관이 묻어나는 독소조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학 전공자”가 적절치 않다는 말이 아니라, “교육학 전공자만 할 수 있다”고 못박는 발상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8.
의견이 다소 장황합니다만, 사전에 입법예고를 거쳐 이런 사회적 논의들이 수렴 여과되어 걸러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조례의 내용이 옳다, 그르다 하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조례가 천명하고 있는 정신과 철학을 함께 음미하고 공유하자는 의미에서 낸 의견입니다.
식견과 견문이 많이 부족한 이 사람이 구태여 나서서 이런 의견을 드리는 까닭은 시민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의 정립을 위해 소통이 필요하다고 여긴 까닭입니다. 제도를 보완하고 정비하는 것보다, 큰 틀에서 가치와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한 문제이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이해의 지평이 열리고 비로소 참다운 소통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아울러, 필요할 경우 본인이 속한 단체의 구성원과 조례내용을 세부적으로 검토, 논의하여 정식으로 개정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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